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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성경만으로, 초대교회로 돌아가자!

믿음 계보(창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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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창세기에 따르면 지구상의 모든 사람들은 천손(天孫) 곧 하늘의 자손, 다시 말해 신의 후손이요.

그 신은 하나님이십니다.

즉 우리 '사람'은 하나님의 존재 여부를 믿든 안 믿든 이에 대해 논쟁을 끌어와 말로 싸우든 물리력으로 싸우든 상관 없이 하나님의 계심으로 그 분에 의해 지음 받은, 창조주에 의한 피조물입니다.

하나님은 지은 우리를 가리켜 '사람'이라 하셨고, 그게 피조물 우리를 가리키는 이름이 되었습니다.

그 중 첫 사람, 그를 '아담'이라고 하셨으니 피조물 사람으로서 지구상에 있는 우리 모두의 조상되시는 이는 '아담'입니다.

아담 홀로 '사람'이었으며 당시에는 하나님께서 모든 창조행위를 마치신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사람처럼 살과 피를 가진 짐승들은 짝이 있었는데 우리 조상 아담은 짝이 없으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아담 앞에 짐승들을 불러 모으셨습니다. 그리고 아담이 어떻게 이름짓는지 보셨습니다.

아담은 그때 짐승들의 이름을 짓는데 그 이름은 곧 하나님이 그 짐승을 지으신 바를 정확하게 짚은 이름이었습니다.

하나님은 피조 만물 중에서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 같은 존재로 지으셨는데 이 시험을 통해 사람은 짐승과 구별되며 아담의 짝, 곧 배필될 존재가 짐승 중에 없음을 아담이 확인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리고나서 하나님은 아담을 재우십니다. 아담으로부터 갈빗대 하나를 빼내기 위해서 그러셨습니다. 그리고 그 빈 자리는 살로 채우십니다. 이게 어떻게 가능하냐고 반문하시는 분들...... 사람을 지으신 분입니다. 사람보다 사람에 대해 정확히 알고 계시는 게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인류 최초의 수술을 받은 아담이 깨어났을 때, 그의 눈 앞에는 잠들기 전 이름짓기를 할 때 보지 못했던 존재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그 짐승에게 주신 속성을 정확하게 짚어낸 탁월한 능력을 가진 아담답게 그 존재가 '사람'임을 알아보았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아담은 하나님이 알려주시지 않았음에도 '그 사람'은 "내 뼈와 내 살로 만들었다."며 그 속성까지 정확하게 꿰뚫어 봤습니다.

이 얼마나 탁월한 능력을 가진 사람입니까! 이처럼 범죄 전 사람은 범죄 후 사람들, 특히 오늘날 우리 사람들은 도무지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탁월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아담은 자기와 같은 사람이긴 하지만 자기와 구분된 사람이기에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지음 받은 사람인 자기는 '남자'라 칭하였고, 남자를 근거로 남자로부터 난 사람을 '여자'라고 칭합니다.

드디어 아담의 짝, 배필 여자가 지음 받아 아담의 곁에 머물게 됨으로써 사람은 남자 사람 1명과 여자 사람 1명. 지구상 총 인원은 2명이 되었습니다.

 

앞서 절대적, 물리적, 혈통적 계보로서 살과 피를 가진 모든 사람에게 해당되는 계보이자 조상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지금부터는 우리 '믿음' 계보에 대해 살펴보기 하겠습니다.

범죄 후 아담은 에덴에서 쫓겨나기 전에 여자의 이름을 '하와'라 지어줍니다.

하와란 '산 자의 어미'라는 뜻입니다.

쫓겨나는 불행이 닥친 이 때, 아담은 여자에게서 어떤 희망을 보았기에 이런 이름을 짓게 되었을까요?

이 의문에 대해서 나중에 따로 다룰 수 있는 기회가 있기를 바라겠습니다. 왜냐하면 지금 계보에 대해 언급하는 중에 샛길로 빠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의문을 뒤로 하고 우리 '믿음' 계보를 향해 계속해서 알아보고자 합니다.

 

아담과 하와 사이에 아들 둘이 태어납니다.

장자의 이름은 가인, 차자의 이름은 아벨입니다.

물론 이 둘만 태어난 건 아닙니다. 이들 밑으로 여럿 동생들이 태어났습니다.

가인과 아벨은 부친 아담으로부터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의례를 배웠고, 장성하여 각각 자기들의 직업을 가진 이후로는 부친을 통해서가 아닌 자기들이 독립하여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의례를 행하였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차남 아벨이 하나님께 드린 제사는 하나님이 받으셨으나 장남 가인이 하나님께 드린 제사가 거절당한 것입니다. 이로 인해 가인의 심기가 상했는데 어찌나 심했는지 하나님이 직접 그의 분함과 그로 인해 안색이 변한 것을 지적하시며 "네 죄가 아직 네 안에 머물고 밖으로 드러내지 않은 상태이니 다스려라." 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가인이 하나님께 바른 제사를 드리지 못한 잘못과 그것이 가인 안에 있는 죄로 말미암은 것임을 아시고 이제는 돌이켜 스스로 바로잡기를 바라신 것입니다.

마침 아벨의 제사를 하나님이 받으셨으니 가인은 동생 아벨에게 가서 하나님이 받아주시는 바른 제사를 보고 배움으로써 자기 안의 죄를 깨닫고 바른 제사를 통해 자기의 죄를 돌이키는 행위를 하면 하나님이 가인의 제사도 받아주실 것입니다. 그러면 제사의 본의미. 하나님이 사람을 만나주심. 제사를 통해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화평(和平, Peace)이 있게 됩니다.

이처럼 가인은 여러모로 회개하기에 좋은 환경에 있었습니다.

부친 아담도 동생 아벨도 하나님께 바른 제사를 지내고 있었고 에덴의 동편 땅에서 함께 거주하였으니 멀리 있지도 않습니다. 더욱이 하나님이 직접 가인 자신의 상태가 어떤지 알려주시기까지 했습니다. 어쩌면 죄가 안에서 밖으로 나올 다급한 상황이라 하나님이 직접 나서서 말씀해 주신 것일지도 모릅니다만 아무튼 욥처럼 자기 죄가 무엇인지 몰라서 회개하고 싶어도 하지 못하는 답답한 심정에 육신까지 병들어 죽어가는 형편도 아닌 가인은 하나님과 화평하기에 정말 좋은 환경에 있습니다.

그런데...

그래야 하는데......

왜, 부잣집 도련님은 부자 아빠를 둔 것에 감사할 줄 모르고, 내 멋대로 살고 싶다며. 부유한 그 집은 감옥이라면서 튀어나갈까요? 보장된 지위도 버리고. 드라마에서는 부자 아빠가 꼰대로 묘사되고 그로 인해 나쁜 감정이 시청자에게 전이되긴 하지만 그건 드라마 주인공이 부자 아들놈이라 그렇고 정작 부자 아빠를 조명해 사실적으로 묘사한다면 부자 아들놈은 부친의 깊은 사랑을 전혀 볼 줄 모르는 천하에 몹쓸 불효자식임을 알 것입니다.

가인이 그랬습니다.

동생 아벨을 죽였습니다.

아벨은 부친 아담과 동일한 바른 제사를 드리는 자식이었습니다. 아담이 얼마나 큰 슬픔에 빠졌을까요.

하나님이 가인에게 물으십니다. 몰라서 물으셨겠습니까? 그럼에도 가인에게 아우의 행방을 물으십니다.

"모릅니다. 내가 아우 돌봐주려고 태어났습니까?"

가인에게 다른 무엇은 전부 차치하고, 최소한, 자기 아버지 아담을 생각하는 마음, 양심이 있었더라면 이런 뻔뻔한 대답이 나올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에덴의 동편 땅에서 가인을 내쫓으십니다. 가인을 위해서가 아닙니다. 아담을 보호하기 위함입니다. 자기한테 이래라 저래라 하는 하나님이 미워서,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동생, 자기 아우를 죽이는데 꺼림이 없는 자입니다. 더 나아가 부친 아담을 죽이지 못 할 까닭이 없습니다.

가인은 그제서야 두려워졌습니다. 자기가 저지른 죄에 대한 가책으로 두려운 건 아닙니다. 형제들로부터 아우를 죽인 살인자는 이제 자기 생명이 끊어질 것이 무서웠습니다. 아우의 생명이 끊은 자가 정작 자기 생명이 끊어지는 것은 무섭고 싫어합니다.

또 하나의 이유는 가인이 농사 짓는 자였기 때문입니다.

가인은 농사를 짓는 일이 업이었습니다. 그런데 이후로는 가인이 땅에 어떤 작물을 심든 땅은 이제 그 결실을 가인에게 주지 않습니다. 정착생활이 기본인 농부가 땅으로부터 결실을 얻지 못해 떠돌이 생활을 하게 된 것입니다. 더군다나 떠돌이는 자기보호할 능력이 정착한 이에 비해 현저히 떨어집니다.

그래서 가인은 방금 전까지 하나님께 되려 따지는 듯 사나운 태도에서 호소하는 태도로 180도 태세전환을 합니다. 타이르시는 하나님을 얕잡아 보았다가 드러난 죄를 꼬집으시니 옆에 마음에 안 드는 바른 말 잘 하는 사람에게 눈 부라리듯 하나님을 무시하더니, 정한 바를 기필코 집행하시는 하나님의 엄위로움을 알기에 상황이 바뀌자 비로소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자비를 호소합니다.

그런 가인에게 하나님은 그 생명을 보장해 주시며 증표를 주십니다. 아마 가인은 뛸듯이 기뻤을 겁니다. 땅에서 쫓겨남에 대한 두려움도 가셨을 겁니다. 농사를 못 지으면 다른 직업을 찾으면 되고 이제 더 이상 하나님과 더 볼 일이 없을 거라는데 행복했을 겁니다. 하나님께 버려진 자는 버려짐을 기뻐합니다.

가인은 자기 식솔들을 거느리고 떠나서 가장 먼저 한 일은 성 쌓기였습니다.

가인의 성쌓기는 하나님과 단절입니다.  자기 멋대로. 자기 즐거움 추구하는 구역을 임의로 설정하였고 그게 가능했습니다. 에덴의 동편 땅 외에 자기가 어디든 갈 수 있는 땅이 사방에 있습니다. 이것이 가인이 추구하는 방향이며 하나님과 상관 없는 자유입니다. 그렇게 가인 계보가 형성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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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믿음' 계보를 설명하기 위한 배경 설명이 길어졌습니다.

우리 믿음 계보는 가인이 쫓겨난 당시에 끊긴 상태였습니다. 아담에게 수 많은 아들들이 낳지만 아벨처럼 하나님께 드리는 바른 제사에 동참하는 아들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쫓겨난 가인 계보는 하나님과 단절한 자유를 맛보며 육체(몸과 마음)를 즐겁게 해 주는 무엇이든지 허용했기 때문에 문화가 발전하였고 그렇게 문명을 형성하였습니다. 당시에 사람의 수명은 천 년에 가까웠습니다. 청년의 기간이 길었고 노년의 기간이 짧았습니다. 쾌락의 궁극을 추구하는 연구를 깊이 있게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또한 아마도 짐승을 잡아 고기요리도 충분히 맛 보았을 것입니다. 당시에 짐승은 사람의 양식이 아니었습니다. 짐승을 죽이는 목적은 오직 하나님 앞에 제사드림이었고, 제사용으로 쓰이는 짐승도 제한되어 있었습니다. 성경의 기록에 따르면 아벨이 하나님께 드린 제물은 '양'이었습니다.

추측컨대 가인이 아벨보다는 부유했을 것 같습니다. 식량을 생산하는 자와 제사용 한정 입에 댈 수도 없는 제물을 생산하는 자의 수입은 현격한 차이가 났을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밥 먹는 일을 필수로 여기는 사람이 많을까요. 예배 드리는 일을 필수로 여기는 사람이 많을까요. 당시에도 그랬을 겁니다. 훗날 그 결과로 지구상에는 노아의 여덟 식구만 남게 됩니다.

아무튼 아벨 사후 셋이 태어났습니다. 아담의 몇 번째 아들인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성경에 기록된 말씀에 의하면 아담이 고백하길 "하나님이 내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하였습니다. 아담은 셋을 통해서 믿음 계대자 아벨을 잃은 슬픔을 위로 받았습니다. 그리고 셋이 아들들을 낳으면서 그 아들 중에서 에노스가 아담과 셋이 하나님께 드리는 바른 제사에 동참하며 성경에 기록된 말씀에 의하면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합니다. 모임 예배가 그 때 시작된 것입니다. 또한 믿음 계보가 대를 이어가게 되었습니다.

우리 믿음 계보는 아담-셋 계보로서 아득히 멀게 느껴져도 오늘날 현재까지 이어온 하나님 계보입니다.

아담-셋 계보의 제사에 동참하여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듯 우리도 그 계보에 속한 자로서 예배에 동참하여 여호와의 이름을 부릅니다.

 

제가 속해 있는 교회에서 [복음 교육 양육 계대 연표] 라는 것을 게시하였습니다.

이 게시물을 보며 우리 믿음 계보가 어디서 왔는지를 성경에 기록된 글로 읽는 것과는 또 다른 감동이 일어서 본 글을 적었습니다.

우리 믿음 계보에 속한 하나님의 자녀들이 믿음 계대의 중요성을 깨닫고, 혼인의 소중함을 깨닫기를 바랍니다.

우리 믿음 계보는 세상의 다른 어떤 계보와 결코 섞임 없는 구별된 계보입니다. 자기 자신뿐 아니라 이에 속해 있는 형제를 하나님 앞에 소중히 여기고 사랑하며 진실하게 대하는데 본 글을 읽는 형제들에게 각성의 계기와 한 번뿐인 구원 입은 믿음 인생을 사는데 유익이 되었으면 합니다.

 

믿음 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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